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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 현충일을 느끼며 - 나라를 위해 순직한 모든 이에게
카테고리 사회

현충일을 느끼며

나라를 위해 순직한 모든 이에게

 

많은 이의 희생이 담겨있는 오늘, 현충일

 6월 6일 아파트부터 도로, 가게 앞 조기 게양한 태극기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태극기를 조기 게양하며 추모의 뜻을 밝히고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1분간 묵념을 올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현하고 있는 오늘은, 67주년을 맞이한 현충일로 국토방위에 목숨 바친 이의 충성을 기념하는 날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돌아가신 모든 이의 편안한 영면을 기도하며 추모하는 현충일은 단순 공휴일로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현충일의 역사는 국군 묘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전쟁 중 전사자 수가 증가하자 국군 묘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여러 번의 논의를 거쳐 1957년 국군 묘지 묘역을 조성했다. 이후 국군 묘지는 1965년 <군묘지령> 의해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이에 ‘군인, 군속으로 사망한 자’ 외에 ‘국가에 유공한 자’가 포함되면서 국군 묘지에서 국립묘지로 확대됐다. 1956년 <현충 기념일에 관한 건>을 국방부령으로 제정, 공포하며 ‘현충 기념일’을 제정했다. 이어 1975년 1월 27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며 ‘현충 기념일’에서 ‘현충일’로 명칭이 변경됐다. 이로써 국군 묘지에서 시작된 현충일의 의미가 비로소 완성됐다.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에 있는 한국전쟁 관련 현충 시설 충혼탑 / 사진=이아연 부장기자
 

충북에서 추모하다

 “이곳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을 모신 곳이오니,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충혼탑에 들어가는 길목 비석에 적힌 문구다. 매년 현충일, 청주 충혼탑에서 오전 10시 정각 전국적으로 울리는 사이렌 취명에 맞춰 추념식이 시작된다.

 충혼탑은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에 있는 한국전쟁 관련 현충 시설이다. 이는 6·25 전쟁 때 순국한 청주와 청원군 출신 전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의를 기리기 위해 1955년 세운 위령탑이다. 이곳에서 애국심을 고취하며 해마다 숭고한 호국영령들의 얼을 기리기 위해 현충일 추념식 등이 거행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충북 단양 곡계굴에 피신했던 민간인들이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지난 4월 26일 충북 단양군에서 곡계굴 폭격으로 희생한 무연고 유해 51구를 발굴해 세종 추모공원에 안치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일원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지역으로 지정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긴 시간이 흘렀다. 왜 우리는 아직도 전사자의 유해를 찾고 있는 걸까. 
 
 
▲지난달 27일 인류진화연구소에서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선주 명예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사진=박성연 정기자
 
 “국가는 국가를 위해 전사한 분들의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고, 
알맞은 예우를 해줘야 한다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박선주 명예교수(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는 전사자 유해 발굴이 가진 추모 의의를 국가와 국민의 계약 관계로 설명했다. 또한, “국가정체성 확립과 인권신장, 이 두 개가 수레바퀴처럼 잘 돌아가는 국가 체제일수록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많은 청년이 유해 발굴에 참여해서 같이 일하고, 땀 흘리고,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알았으면 좋겠다”며 “이를 통해 우리 역사도 정확하게 이해하면 남을 이해하는 마음도 굉장히 넓어질 것 같다”는 소회를 남겼다.
 

현충원에서의 하루

 제67회 현충일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지난달 28일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한 이곳은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가까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기 편하다.
 
 
▲현충문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상징하는 현충탑의 출입문이다. / 사진=이아연 부장기자
 
 국립서울현충원에 들어가는 길목엔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이시어 편히 잠드소서’라고 적힌 현수막이 추모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자 추모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날 현충원에는 주말을 이용해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청대신문>에서 현충원에 방문한 다양한 이의 사연을 들어봤다. 묘역에서 참배하던 A씨(74)는 “6·25 전쟁으로 전사하신 장인어른을 찾아왔다”며 현충원을 방문한 이유를 전했다. 이어 이곳을 올 때 어떤 감정이 드는지 묻자 “전혀 모르는 분을 찾아뵈는 것이 아닌 아내의 아버지이자 장인어른이다. 장인어른 같은 경우 현충원에 계시고 돌아가실 당시 차례를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1년에 한 번 현충일이 기일이라고 생각하고 온다”며 그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현충원에 온 분들이 내 나이대이거나 손자인 걸 보며 동질감을 느낀다. 그분들도 조상이나 할아버지, 아버지 같은 가족들이 여기 계시기에 조문을 온다”며 “어디서 전사했는지, 누구를 보러 왔는지 정도는 물어본다”고 답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제1묘역~56묘역이 존재하고 있다. 비석에는 이름, 생년월일, 전사한 장소가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는 태극기와 꽃이 놓아져있다. / 사진=이아연 부장기자
 
 현충원을 둘러보던 대학생 B씨(24), C씨(24), D씨(25)와도 이야기를 나눠봤다. 현충원에 방문한 이유를 묻자 “한국사 수업 과제를 위해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기도 하고, 현충원이 재학 중인 학교와 가까워 방문했다”고 답했다. 현충원을 둘러보며 느낀 감정에 대해 “현충탑에 들어갔을 때 사진이 많았는데 대부분 젊은 분이었고 벽에 많은 이름도 볼 수 있었다”며 “그중 비어있는 이름 칸도 있고, DNA를 찾기 힘들어 가족의 품에 돌아가지 못한 분들도 있어 마음이 아프고 무거워졌다”는 심정을 전했다. 

▲현충탑 안에는 6·25 전쟁 당시 전사자로 유골이나 시신을 찾을 수 없는 분들이 모셔져 있다. / 사진=이아연 부장기자 
 
 마지막으로 현충원 안내실에서 유가족을 상주하며 현충탑 참배 안내 및 각종 방송을 하는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현충탑 안, 6·25 전쟁에서 전사자 중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6,000여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호국영령 무명용사 봉안실’을 시작으로, 신원은 확인됐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위패 봉안관’까지 설명을 들으며 진행됐다. 

 위패 봉안관 중간중간 지워진 이름에 대해 묻자 “살아있지만, 위패가 있는 경우 본인이 직접 현충원에 방문해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며 “유공자의 유해가 없더라도 배우자와 함께 현충원에 합장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됐다”고 전했다. 또한, “2000년도부터 시작된 유해 발굴 감식 사업이 국가 연구 사업으로 진행돼 수습한 유해를 신원 확인 후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귀환 됐기에 이름이 지워진 상태”라고 답했다.

 그는 현충원에서 일하는 마음가짐으로 “7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찾지 못한 유해들이 13만여 분이 계시다. 국가를 위해 희생, 전사했으면 국가는 그분의 유해를 잘 수습해서 가족분들에게 돌려드리거나 안장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직접 방문하기 어렵다면 공식 홈페이지에 안치된 이들을 위한 추모글 게시, 안장자 찾기 등의 기능이 있어 온라인 참배에 참여할 수 있다. 바쁜 사회 속에 살고 있어 현충일이 누군가에게는 쉬는 날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현충일은 잊어선 안 되는 기념일이다. 많은 이의 희생이 오늘의 우리를 빛냈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그들을 기억하는 달이 되길 바란다. 
 
 
<이아연 부장기자>
000zn@cju.ac.kr
 
<박성연 정기자>
2021011145@cju.ac.kr
 
<권민서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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